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애니메이션 (문단 편집) === 황금기(Golden age)[* 1920년대 말기부터 1960년대 말기까지.] === 미국에서 TV가 많이 팔리지 않았던 [[황금기]] 초기에, [[할리우드]]의 [[미국 영화|영화사들은]] 인기 [[대중매체]]인 영화를 활용해 극장에서 상영할 10분 미만 분량의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했다. 1930년대엔 [[실리 심포니]] & [[메리 멜로디즈]] & [[베티 붑]] 등의 대중가요, 가음악을 덧입히는 [[뮤지컬]] 애니메이션 단편 제작이 활발했으나 40년대부터 대폭 감소했고, 같은 시기 [[루니 툰]] & [[딱따구리(애니메이션)]] & [[톰과 제리]] 등의 사회[[풍자]], [[대중문화]] 요소를 삽입한 작품들이 많은 인지도를 얻었다.[* 1930, 40년대에 루니툰, 디즈니 캐릭터들을 주역으로 저연령층을 겨냥한 코믹스들이 발매된 적도 있다.] 제작사의 이름과 제작자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거론되거나 참가하는 등 애니메이터들이 인지도 면에서 밀리는 환경이긴 했어도, UPA나 워너 브라더스의 '터마이트 테라스'를 포함한 일부 연출가들은 독자적으로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 기법과 코미디 연출을 만들어나갔다.[* 영화 제작 규정(헤이즈 코드)의 [[검열]]과 사회적 분위기의 내외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애니메이터들이 개별적으로 유머 & 개그 연출 창작이 가능한 환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애니메이션 제작 기법과 [[특수효과]]가 점진적으로 상향, 발전한 시점과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음성을 맡는 유명한 [[성우]]들[* [[멜 블랭크]], [[준 포레이]], [[썰 라벤스크로프트]] 등.]이 데뷔하고, [[배경 음악]]이 본격적으로 삽입된 시점도 황금기이다. 1932년의 실리 심포니, 1934년의 메리 멜로디즈를 시작으로 영화사들은 애니메이션 제작 기법에 테크니컬러를 도입시키고, [[1950년대]] 중기엔 잠시 [[시네마스코프]]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 초기엔 워너 브라더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컬럼비아 픽처스 등이 산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운영을 시작하면서 할리우드는 본격적인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 [[경쟁]] 체제로 진입하였다.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은 디즈니 단편 & 실리 심포니 단편의 병행 제작과 동시에 테크니 컬러 사와의 3년 [[독점]] 사용 계약을 체결한 뒤 1932년부터 3색 테크니컬러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1937년 개봉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바탕으로 스튜디오의 유명세를 한층 더 높여나갔다. 피노키오, 환타지아의 흥행 실적이 미미해 [[파산]] 위기에 놓였었지만 선전용 애니메이션 제작과 덤보가 대흥행을 거두면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디즈니는 비슷한 시기 제작한 밤비와 [[전쟁 영화|선전 영화]] 'Victory Through Air Power'의 흥행 실패, 전쟁으로 인한 해외 시장 상실로 인해 [[신데렐라(애니메이션)]] 이전까진 주로 3~40분대 분량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나 단편 작품들을 제작했었다.] 플라이셔 스튜디오는 [[베티 붑]], [[뽀빠이]]의 대흥행으로 당시 디즈니의 경쟁사로 자리매김할 만큼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1934년 7월부터 강화된 헤이즈 오피스의 검열과 1937년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이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전개한 파업, 'mister bug goes to town'의 흥행 실패에 휩싸이며 스튜디오를 파라마운트가 인수하게 된다. 1942년에 페이머스 스튜디오(famous studio)로 개명되고 스튜디오 내부 인력이 대대적으로 물갈이된 영향으로 이전의 위세를 발휘하지 못하며 1950년대부턴 제작 중인 작품들의 퀄리티 또한 낮아지게 된다. 워너 브라더스가 1930년, 1931년에 각각 공개한 루니 툰과 메리 멜로디즈(merry melodies)는 [[스타 시스템]] 캐릭터, 대중음악, 할리우드의 인기 영화배우 등에서 디즈니 단편과 실리 심포니의 모방 작품으로 처음 출발하였다. 허나 1933년 하먼-아이싱 콤비의 이직과 2년 뒤(1935년)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의 '터마이트 테라스'에 근무한 텍스 에이버리 & 척 존스 & [[밥 크렘펫]] 등의 연출가들의 활동으로 전반적인 방향성이 변화하였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제작과 더불어 활발한 의견 교류를 나눈 것과 작업 현장을 필름으로 촬영하기도 했었다. 이는 (당시의) 미국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많은 변화를 남겼고, 활동 이후 40년이 지난 1975년엔 이를 다룬 TV 다큐멘터리 The Boys from Termite Terrace가 제작되기도 했다.[[http://www.imdb.com/title/tt0535649/imdb|IMDB 웹페이지 자료 내용 참조]].] [[MGM/UA|메트로-골드윈-메이어]]는 디즈니를 나온 어브 아이웍스가 제작한 개구리 플립(Flip the Frog)을 선두로 1930년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며, 1934년부턴 휴 하먼과 루돌프 아이싱이 제작한 bosko & happy harmonies 시리즈가 개봉됐으나 뚜렷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당시 작품을 제작하던 하먼-아이싱 콤비(하먼-아이싱 프로덕션)의 연이은 애니메이션 제작 예산 초과로 인해 MGM은 외부 스튜디오와의 계약을 끊고 1937년에 산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자체 애니메이션 제작에 나섰으며, 여기서 제작한 톰과 제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애니메이션 추격물의 양산화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찰스 민츠가 해고되어 사내 스튜디오를 떠난 이후 월터 란츠가 제작자로 새로 부임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이어나가게 되고, 폴 테리는 1929년 테리 툰즈란 새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설립해 밴 뷰런 스튜디오에서 독립하여 1950년대까지 테리 툰즈를 운영해 나갔다. RKO 라디오 픽처스는 제작자 밴 뷰런이 설립한 밴 뷰런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줄곧 배급해 오고 있었지만 1930년대 중기에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을 배급하기로 결정하면서 사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폐쇄하였다. 컬럼비아 픽처스는 1921년부터 운영 중이던 윙클러 픽처스를 유니버설에서 이직해 온 찰스 민츠가 운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스크린 젬스로 개명하였고, 민츠는 죽기 얼마 전에 스크린 젬스를 컬럼비아에 매각시켰다. 이후 컬럼비아가 스크린 젬스를 폐쇄한 1949년까지 운영되었으며 같은 해에 UPA와 새로 배급 계약을 체결해 UPA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배급하게 된다. 1948년의 [[파라마운트 판결]]로 인해 할리우드의 여덟 영화사들이 독점적인 영화관 운영과 배급업의 겸업 & 겸영을 할 수 없게 되어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의 예약 보증이 상실되고 관련된 투자의 비중이 감소하는 등 인식이 차츰 부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부턴 텔레비전 매체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등 미국 영화계, 영화 중심적이던 애니메이션 업계엔 위기감이 일기 시작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 년도상으론 아직 TV 애니메이션이 양성화된 시기는 아니었으나 1950년대 후기부터 차츰 확산된 TV 애니메이션들의 인기로 인해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은 더이상 이전만큼의 위상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여파로 193~40년대에 비해 애니메이션 작품들에서 캐릭터 디자인이 점차 간소화되고 배경 구조가 균일화되는 경향이 잦아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